머리말

머리말

세종임금께서 훈민정음을 만드실 때 자연을 살펴 만들었다고 하였다. 자연이란 저절로(自) 그리된다는(然) 말이다. 밤이 되면 낮이 되고, 겨울이 오면 여름이 온다. 잠을 자면 깨어나고, 먹으면 힘이 난다. 우주 만물에는 이렇게 자동으로 돌아가게 하는 근본원리가 숨어 있다. 이러한 우주는 ‘삼재’라고 부르는 세 가지 중심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천지인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 한다. 세 요소는 하늘이 근본원리의 본체로서 뜻을 드러내면, 땅이 그 뜻을 물질로 드러내며, 사람은 하늘의 뜻을 품고, 물질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완성을 이루어 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그 과정이 살아가는 동안 서서히 진행되기에 전체 원리를 알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람의 말소리에 그 모든 과정이 다 들어 있다. 잠시 말을 하는 동안에도 우주의 시작과 끝이 다 담긴다. 우주에 삼재가 있듯이 말소리에도 삼재가 있고, 우주에 음양이 있듯이 말소리에도 음양이 있다. 우주에 생명이 태어나 살아가며 생로병사를 거치듯이 말소리에도 음소가 태어나 생로병사를 거친다. 특히 삶에서는 완성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없지만, 말소리에서는 완성의 모습까지 쉽게 볼 수 있다. 말소리는 자연과 생명의 축소판인 것이다.  

사람은 두 가지의 눈을 떠야 한다. 흔히 육안이라 부르는 지안(地眼)과 심안이라 부르는 천안(天眼)이다. 지안으로는 나타난 현상을 보지만, 천안으로는 현상의 본질을 본다. 지안은 태어나면서 저절로 열리지만, 천안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다양한 삶의 체험을 한 후에 삶을 돌아보면서 조금씩 열리지만, 특별히 탐구하지 않는 한 좀체 열리지 않는다. 이로 인해 만사 만물의 본뜻을 제대로 알지 못해 곤란과 부딪침이 그치지 않는다. 해례본에서는 이를 몽롱(朦朧)이라고 한다.

훈민정음은 귀로만 들을 수 있던 한순간의 말소리를, 언제까지고 눈으로도 볼 수 있게 한다. 덕분에 말소리가 생겨나고 변화하는 과정을 자세히 탐구할 수 있다. 말소리는 무형이지만, 물질의 요소를 그대로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뜻을 펼치고 이루어가는 생명 존재의 요소도 갖고 있다. 곧 말소리에 담긴 원리를 아는 것은 물질의 창조원리와 생명의 변화원리를 아는 것이다. 또 삼재를 아는 것은 생명의 목적을 아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이렇게 만물과 생명의 본질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니 훈민정음은 곧 천안을 열게 하는  비법인 것이다.

훈민정음의 훈민은 백성을 가르친다는 말이다. 훈민정음이라는 음소에는 하늘과 땅과 만물이 무엇인지,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이루어가야 하는지,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를 쉽게 알 수 있도록 해설한 책이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이 책은 세종의 명을 받들어 8명의 학자가 33개월에 걸쳐 만들었다. 33장의 지면에 33개 문장으로 서문을 담았고 280개의 문장으로 제자원리를 해설하였다. 점 하나, 획 하나도 근본 원리에 어긋나지 않게 철저히 맞춘 것으로 인류역사 최고의 응용철학서라 할 수 있으며, 모든 과학의 처음과 끝이라 할 수 있다.

훈민정음의 원리를 이해하면, 핵심을 볼 수 있게 된다. 사물에 숨어 있는 가치를 볼 수 있어 복잡한 일도 단순하게 풀어갈 수 있다. 또 참 자아를 알게 되어 자신을 진정 사랑할 수 있으며, 감정과 욕망도 뜻대로 다스리며 삶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또 자연의 원리를 잘 알게 되어 예측하고 대비하는 능력을 갖추어 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을 알기에 저절로 그리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을 것이니 참된 평안을 누리며 마침내 하늘과 땅을 품은 존재로 거듭날 것이다.